자기결정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기결정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대서울병원 장지영교수(성산생명윤리연구소 연구팀장, 트루스포럼리서치센터장)
이대서울병원 장지영 교수의 기고문입니다. 장지영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연구팀장 및 트루스포럼 리서치센터장으로 활발한 활동 중에 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미 비포 유’는 조조 모예스의 베스트셀러 소설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자 미래가 보장된 젊은 사업가 윌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환자가 된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완벽했던 삶을 사랑했던 윌은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고, 외부와 모든 소통을 단절한 채 살아간다. 극도의 절망과 우울에 휩싸인 윌의 공격성에 더 이상 고용할 간병인조차 없는 상황에서 루이자가 임시간병인으로 고용된다. 부요와는 한참 거리가 먼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매사에 한없이 긍정적인 루이자 덕분에 윌은 삶의 ‘기쁜 순간’들을 다시 경험한다.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졌던 윌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가고 윌은 사랑의 힘으로 삶의 의지를 다시 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윌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안락사에 대한 계획을 밝히고, 루이자의 설득과 간청에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 가서 가족들과 루이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영화는 윌의 유산을 상속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루이자의 모습과 “당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살길 바라며, 내 마음에는 영원히 당신이 새겨져 있다”는 윌의 유언이 나레이션 되며 끝을 맺는다.
당시 영화를 함께 관람했던 지인은 엔딩 장면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필자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주장을 이토록 아름답게 포장하는 영화에 다소 섬뜩함을 느꼈다. 예상대로 영화 개봉 후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영화는 바로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고통받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 영화 ‘미 비포 유’ 포스터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높아지고 있는 지금,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와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 2019년 서울신문이 한국환자단체연합회(544명), 대한전공의협의회(183명), 사법연수원(64명)에 의뢰하여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조사자의 70% 이상이 소극적 안락사에 찬성하며 윤리적으로도 정당하다라고 답했으며 환자 측의 과반 이상은 적극적 안락사에도 동의했다. 같은 해 방영된 드라마 ‘의사 요한’에서는 말기암 환자가 고통없이 죽을 수 있도록 협조하여 살인 혐의로 복역한 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또한 지난해에는 신생 변호사 단체인 사단법인 ‘착한법 만드는 사람들’은 존엄사 입법촉구 세미나에서 직접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존엄사 입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양한 의견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무엇이 타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안락사, 연명의료 중단 등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여러 단어들이 혼재되어 사용되면 문제의 본질을 불명확하게 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데 안일한 태도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안락사(Euthanasia)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죽음을 앞당기는 인위적 조치를 통칭하는 것으로 환자의 동의 능력과 의료진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그 범주를 구분할 수 있다. 우선 환자가 죽음에 자발적인 동의를 할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실제 동의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반자발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 비자발적 안락사(non-voluntary euthanasia)로 구분된다. 자발적 안락사는 환자 자신이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때 의사가 개입하면 이를 의사조력자살이라 부른다. 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법이지만, 스위스 소재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를 통해 매년 200여건의 조력 자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사가 처방한 치사량의 약물을 환자가 스스로 복용하고 의사가 약을 직접 주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적극적 안락사와는 구분된다. 2016년과 2018년에 한국인 2명이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자발적 안락사는 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행하지는 의도적인 죽음으로, 살인의 범주에 속한다. 비자발적 안락사는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없는 신생아, 혼수상태, 노인성 치매 환자 등을 상대로 행해지는 경우로 역시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다음으로 의료진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적극적 또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적극적 안락사는 치사량의 약물 주입과 같이 죽음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네덜란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지되고 있다.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지연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일반의료(물, 영양분, 단순 산소공급 등)와 특수연명의료(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를 모두 유보 또는 중단하는 경우와 일반 의료는 시행하면서 특수연명의료만 유보 또는 중단하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전자는 살인의 범위에 속하며, 후자는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에 속한다. 소극적 안락사와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연명의료중단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존엄사(death of dignity)’도 주의하여 사용해야 하는 용어이다. 존엄사의 개념은 1994년 미국의 오레곤 주에서 제정한 ‘존엄사법(Dead with Dignity Act)’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최초로 의사 조력자살을 명시적으로 허용한 법안이다. 따라서 일부 언론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을 존엄사법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연명의료중단은 회복이 명백히 불가능한,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상태에서 과도한 의료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존엄하고 순리적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환자를 돕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만 중단 가능한 연명 행위에 포함되었으나, 2019년 3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술’을 추가함으로써 체외생명유지술, 혈압상승제 투여 등이 중단 가능한 시술로 포함되었다. 연명 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영양분, 물,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환자의 동의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대리 결정의 경우에도 환자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사전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이나 전국 238개 국민건강보험공단 본부, 지사 및 출장소에서 작성할 수 있으며 연명의료계획서는 의료기관 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관에서 작성 할 수 있다. 연명의료계획서와 사전연명의향서를 작성했어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된 이후 3년동안 약 80만명의 사람들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실제 임종과정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임종기 환자도 누적으로 13만 5천여명에 이른다.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이 삶의 질의 척도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하게 맞이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 윤리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안락사가 ‘자기결정권’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을 끝내는 것은 타당하다’, ‘내 삶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와 같이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의 인권이다. 고통이 있는 삶은 가치없는 삶이라는 인식의 극단은 장애인, 정신질환자, 만성 질환자들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으로 간주하여 말살한 나치의 정책과 맞닿아 있다. 고통이 있는 삶이라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죽을 권리는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권리이다. 절대 넘어서는 안될 금단의 선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윤리적 민감도(ethical sensitivity)”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의 주요 개념 및 연명의료 결정 절차>
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9세 이상인 사람이 자신의 연명의료중단이나 유보 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전자문서를 포함)로 작성한 것➁ 연명의료계획서: 모든 말기환자 등의 의사에 따라 담당의사가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중단이나 유보 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사항을 계획하여 문서(전자문서를 포함)로 작성한 것으로 질병제한이 없다. ➂ 임종기: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로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이 판단한다.➃ 말기환자: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으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로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다. 2019년 3월 27일부터 말기 환자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를 이용 중인 환자의 경우에는 임종과정환자 판단을 담당 의사 1인의 판단으로 가능하도록 개정됐다. ➄ 연명의료 중단범위: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그 밖에 담당의사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시술
환자 의사 | 확 인 방 법 |
환자의 의사능력이 있을 때 | – 연명의료계획서 (말기, 임종기 환자 작성 가능)-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원하는 사람 작성 가능)+ 담당의사 확인 |
환자의 의사능력이 없을 때 |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의사 2인의 확인- 가족 2인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 + 의사 2인의 확인* 가족: 1. 배우자 2. 직계 존비속 3. 형제자매 (1, 2 없는 경우)* 환자 가족이 1인 뿐인 경우, 1인의 진술로도 가능 |
환자의 의사를 확인 할 수 없고,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일 때 | – 미성년자의 경우, 친권자인 법정대리인의 결정 + 의사 2인의 확인-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 + 의사 2인의 합의 * 행방불명자 등 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자 제외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본 글은 더워드뉴스(THE WORD NEWS)에도 기고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대표 이진수)
편집: 성남시의사회 공보부회장 김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