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진의원 인터뷰
|걷고 또 걷다 大醫가 되다
신상진 새누리당 국회의원
야학교사, 노동운동가, 개원의, 시민운동가, 성남시의사회장, 대한의사협회장, 국회의원. 올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또다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신상진 새누리당 의원이 걸어온 길은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 결코 평탄하지 않다. 누군가 필요하다고 할 때면 마다하지 않고 그는 그 길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그는 험난한 길 위에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는 4선 국회의원으로 당내 중진이 됐고,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전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몸을 치료하는 소의(小醫), 마음을 치료하는 중의(中醫)를 넘어 어느새 한국사회를 치료하는 대의(大醫)의 삶을 걷고 있는 신상진 의원은 먼 길어 돌아 그의 꿈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지난 5월 국회에서 신상진 의원을 만나 인생행로 이야기를 들어봤다. – 본 글은엠프레스김민아 기자 취재로 본 웹진과 유닥터에 동시 게재된다. air max 90 damskie pomara czowe (출처 엠프레스) ——————————————————– 197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New Balance buty dziecięce Andre Ethier Jersey 더 어렸을 적엔 판사를 꿈꿨지만, 만성골수염을 앓으면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 6개월 간 머무르면서 의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 가난한 사람들은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아가도 수술을 받을 돈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야 했다.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그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의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좋은 의사가 되기를 꿈꿨었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뒤,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자는 순수한 취지로 야간학교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Asics Femme Pas Cher 야학 교사를 하다 보니 사회 변화, 사회 정의,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복지사회’ 같은 것을 꿈꾸게 됐다. 당시 사당동의 한 야학교에서 초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adidas zx 700 femme bordeaux 그때 가난한 아이들, 공장노동자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됐다. Womens Air Jordan 7 그러다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공사 현장에서 열일곱의 나이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겼다. 그 학생의 죽음을 보고, 의사가 돼 몇 사람을 고쳐주는 것보다 어려운 현실에 처한 어린아이들, 학생들, 청년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누구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와서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New Balance 446 mujer 그런 상황에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나름 고민하다 의대 공부를 내려놓고 노동운동을 하게 됐다. 노동현장을 직접 체험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82년 투옥되기도 하고 의대에서 제적당하는 일도 겪었다. Nike Air Max 2016 Dames Zwart 현재 지역구인 성남과 인연을 맺은 것도 84년 상대원 공단에 위장취업을 하면서부터다. 1년간 투옥됐다가 출소하고 나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그곳에 위장취업을 했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Danny Amendola 농민・농촌 활동, 말하자면 민중운동도 그 시절 했다. 80년대에 노동운동이 점차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지도자를 배출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Nike Italia 굳이 외부인이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가르쳐주고 도와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89년 복학했고 제적된 지 8년 후, 그러니까 의대 입학 15년 만에 졸업했다. hogan scarpes shop Nike Air Max Goedkoop 91년 졸업 후 개원했는데, 그때 마침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자연스레 시민운동을 하게 됐다. 성남에서 NGO를 조직해 성남시가 예산을 바로 쓰는지 감시하는 운동과 지방의회 감시 활동 등을 펼쳤다. nike air max 2017 hombre 또 성남시의 숙원 사업 해결에도 나섰다. 성남에는 특히 아파트 관련 분규가 많은데,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 척결 등을 위해 ‘아파트공동체문화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NGO 활동을 한 것이다. 성남시에서 NGO 활동하면서 성남시의사회장이 됐는데, 그 당시 정부는 의약분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의협 내 소수 의사 단체였던 민주의사회가 간선제 체제였던 의협 회장 선거에 나를 추천했다. 의협 회장이 되고 싶어서 출마했다기보다는 의약분업 사태라는 의료계 큰 현안을 두고 의사사회가 겪는 어려움과 억울함 등을 해결하라고 주변에서 나를 내세운 것이다. 투쟁 경력이 있는 나를 내세우는데 그걸 거절하지 못해 출마했다. 그렇게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했다. 당시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의협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공석이 된 위원장 자리를 나에게 메워달라는 요청이 또 들어왔다. 나의 어떤 점을 좋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원장을 맡아 의약분업에 올바르게 대처해달라는 청에 못 이겨 또 그 자리를 맡았다. 그 자리는 정부와 싸워야 하는 자리, 구속의 위험도 불사해야 하는 자리였는데 그런 험준한 길을 안가겠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투쟁위원장을 맡았다. 아니나 다를까 투쟁을 하다가 정말로 또 감옥에 갔다. Houston Cougars Jerseys 출소 뒤 다시 개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년 뒤인 2001년 의약분업 사태에 대처하는 의협 집행부의 태도와 결과에 대한 불만,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인한 위기 등을 겪으며 의협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 상황에서 의협은 회원들의 뜻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직선제 형태로 의협 회장 선거를 바꾸는 정관개정을 했다. 2001년 10월 처음 열린 직선제 의협회장 선거에 떠밀리듯 나갔는데 75%의 득표로 회장에 선출됐다. 당시 의료계에는 의약분업이라는 커다란 파도에 맞설 수 있는 리더가 없었다. 그 때 꼭 필요했던 리더의 조건이라고 하면 대정부투쟁을 할 수 있는 사람, 투쟁을 해본 사람이어야 했다. 내가 그런 조건에 맞았다. 또 나는 워낙 가진 게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28평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고, 병원 역시 작은 곳을 임대해서 열었다. 대정부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재산이나 수입이 많으면 꼬투리 잡히기가 쉽다. 그러니까 ‘투쟁을 할 줄 하는 가난한 의사’라서, 나를 필요로 했던 듯하다. 또한 주변에서 나의 헌신성을 많이 인정한다. Nick Chubb Georgia Football Jerseys 어떤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힐 수 있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조직을 이끌 때에는 반드시 회원의 뜻을 받아 운영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Adidas Harden 2.5Pe 그래서 내게 전폭적인 지지가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New Balance Tienda 정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활동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투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 Alan Branch 학생 때나 젊었을 때, 의료계 수장으로 대정부 투쟁을 이끌 때와는 전혀 다른 역할과 책임이 지금 나에게 있다. 그리고 사실 투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남 1녀 중 장남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싸우고, 싸워서 빼앗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장남이어서 사촌 동생들도 많았고, 이웃에 모여 사는 또래들도 있어서 동생들을 데리고 놀고 아우르는 전형적인 장남 성격으로 자랐다. 다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면 이익과 불이익을 따지지 않고 돕고, 불의에 맞닥뜨리는 순간마다 느끼는 대로 행동하며 살았기 때문에 투쟁가로 보는 것 같다. 어디선가 나를 필요로 하면 불길도 마다 않고 뛰어든다. 노동운동을 할 때도 그랬고, 의약분업 투쟁을 이끌 때도 그랬다. 하지만 2000년 6월 의약분업으로 총파업할 때 투쟁위원장으로서 “투쟁을 하자!”고 외친 게 아니다. 준법 투쟁을 할 것인지, 파업 투쟁까지 갈 것인지 투표를 해서 80% 가까운 회원이 파업투쟁까지 하자고 해서 회원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nike free run 3.0 v4 damskie 투옥도 하고 어려운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살아오다보니 투쟁가처럼 보인 것이지, 타고난 성격 자체는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를 유도하는 것과 대안을 찾는 것에 더 가깝다. goedkoop nike air max 2017 나를 뽑아준 사람들은 우리 성남 중원구의 노점상 아주머니부터 경로당의 어르신, 기업하는 사장님 등 다양한 국민이다. 나를 뽑아준 분들, 그리고 더 나아가 국민이 내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잘 되게 하는 것이 내 일이다. Soldes Under Armour 다만 개업의사로 10년 있었고, 의협 회장을 했고, 의약분업 투쟁 현장의 최일선에 있었던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국회에서 보건의료 관련 사안들이 논의되거나 사회적 문제가 됐을 때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nike air presto donna 의료계의 내막과, 의료 현장의 무엇이 얼마나 열악하고 어려운지, 세계적으로 내놓을 만한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가 있기까지 의료인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기 때문에 의사들의 전문성을 침해하거나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의료제도가 이용될 때에는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막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다. 또 의료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만큼 동료 국회의원들이 의료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자문을 해주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보건의료 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도 맞다. 의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우리나라 의료가 제대로 발전하고 의료전문가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서, 잘못된 것을 막는 일이 내가 국회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Boise State Broncos Jerseys 재선 때는 종합병원이 신축이나 증축될 때 다인실 병상 수가 전체 병상의 70% 이상이 돼야 상급병실료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마련했다. 성남시 중원구가 서민동네이다 보니 3차 병원의 1, 2인실 상급 병상 비용이 비싸서 부담이 된다는 민원이 많았기 때문에 추진한 것이다. 또 성남시의료원을 대학병원이 위탁 운영하도록 해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수행하는 의료기관으로 만드는 데도 나름의 역할을 했다. 또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있을 때는 희귀질환에 쓰이는 약이 건강보험 비급여로 된 것을 급여 항목으로 바꾸는 것 같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나름 일을 많이 했다. 20대 국회에서도 국민이 바라는 의료제도는 언제나 관심을 갖고 추진할 생각이다. nike air max pas cher 20대 국회에서는 상임위원장을 맡게 될 것 같다. 복지위는 야당 몫으로 정해져서 힘들 것 같고, 상임위 별로 미정인 곳도 있어 아직 어느 상임위를 맡게 될지 정해진 것은 없다. 20대 국회 후에는 5선 의원이 돼있거나 낙선 의원이 돼있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사회문제와 씨름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일 속에서 보람을 찾는 편이다. 정치를 하니 지역구 주민은 물론 많은 국민이 봤을 때 ‘좋은 정치인’이라는 평을 받았으면 좋겠다.
장관이나 국회의장 같은 자리를 탐내기보다는 국민의 인정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또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 두 딸들에게는 좋은 아빠가 돼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그런 가정을 유지하고 싶다. 힐링 시간도 좀 갖고 싶긴 하다.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이 바빠 자주 못가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틈틈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Maglie Cleveland Cavaliers 내가 회장이었을 당시에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리더의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다고 본다. 의료계가 가뜩이나 어려운데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되는 것을 보면 의협 회장을 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다. 현재 의협이 처한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안정적인 전문가 단체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여러 제도에 대해 대처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의협이 국민과 함께 하고, 국민에게 봉사도 하며, 국민에게 올바른 건강의학 상식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국민과 같이 호흡하는 의사협회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의협의 기본 과제를 추진하는 데 힘이 분산되면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