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예술4_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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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예술4 – 렘브란트

연세제일내과의원
노현정 원장

 

 

‘네덜란드’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지요. 튤립, 풍차, 히딩크, 하멜, 마리화나… 미술애호가들에게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와 동의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랍니다.

왜 그가 최고의 화가라 불릴까???

궁금~~~하시지는 않겠지만, 그냥 저 혼자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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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신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인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라는 그림입니다. 같은 네덜란드 화가였던 반 고흐가 “이 그림을 이 주일 동안 계속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목숨에서 10년이라도 떼어줄 텐데…”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지요. (저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인생의 좌우명이라 그럴 생각은 없답니다.^^;;)

부인을 바라보는 남편의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 성실한 결혼 생활을 맹세하는 듯한 다정한 손길. 남편에 대한 순종과 사랑에 대한 보답을 약속하는 부인의 눈빛과 자세… 이 세상에 저런 완벽한 부부가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흐뭇함으로 가슴을 부풀게 하는 그림입니다. 나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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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1627년 >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에서 방앗간 주인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허걱. (이 시대는 원래 애들을 많이 낳았데요.) 예나 지금이나 방앗간하면 꽤 사는 집이죠. 그래서 상당한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 자화상인데, 세상에 때 묻지 않고 순수한, 그러면서도 열정을 품은 청년의 모습입니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통치에서 막 독립해서 신교도들이 국가를 새로 세운 따끈따끈한 신생국가였습니다. 전통적인 귀족층이 없다보니 무역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들이 상류계층으로 부상하던 시기지요. 지금 우리나라의 ‘졸부’들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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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4>

 

신교도 국가이다 보니 카톨릭 교회가 좋아하는 요란한 종교화에 대한 수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이 다 굶어죽을 판이었는데요, 다행히 신생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이 됩니다. 어느 직종이던 블루오션이란 있는 법이죠.

위의 그림은 렘브란트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준 출세작입니다. 그 당시 단체 초상화는 졸업 앨범의 단체 사진처럼 주루룩 직선으로 사람들을 배치했고, 표정도 누가 누군지 잘 구별이 안갈 정도로 비슷하고 경직된 표정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런 틀을 깨고 인물의 배치를 입체적으로 바꿨으며, 인물들의 표정을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 혁신적인 그림이랍니다. 이후 초상화 의뢰가 줄을 잇게 되고 렘브란트는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어 돈방석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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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머는 삼손, 1636>  

(부인 사스키아를 절세 미녀 데릴리라로 그렸답니다.)

 

그러던 중 젊은 렘브란트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암스테르담 시장을 배출한 명문가의 외동딸 ‘사스키아’가 블루칩 화가였던 렘브란트에게 반해 엄청난 지참금을 들고 시집을 왔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철이 없던 두 사람은 흥청망청 돈을 쓰며 사치스럽게 삽니다. 망할 놈의 지름신이 강림해서 쓸모없는 골동품과 투자 가치도 없는 잡다한 물건들을 집에 쟁여 놓았다고 하네요.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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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640>

 

한참 잘 나가던 30대의 자화상인데요, 성공 가도를 달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의 모습이지요. 옷과 장식도 귀족처럼 화려하고 표정과 자세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한 느낌까지 듭니다.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청춘 시절…….

아마 렘브란트가 본인의 화풍을 바꾸지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주기만 했다면 계속 잘 먹고 잘 살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지금 렘브란트의 이름은 잊혀졌겠지요.

어느 날 그는 ‘그 나물에 그 밥’인 그림그리기를 탈피해서 인간의 내면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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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1642>

 

36세 때 그린 ‘야경(夜景)’이라는 그림이 그 신호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로터리 클럽 같은 지역 유지들의 모임을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인물들의 배치와 동작이 생동감 넘치고 표정들에서 각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게 표현된 그의 대표작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돈을 내고도 저 뒤에 작게 그려진 인물들의 불만이 폭주했지요. 그리고 한참 시대를 앞서간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었다는 것이 문제.

이 그림 이후로 초상화 주문이 뚜욱 떨어졌고, 사랑하는 부인도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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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656년>

 

부인 사스키아는 죽으면서 렘브란트가 재혼할 경우 그녀의 유산을 수거해 아들에게 돌려주라는 유언을 합니다. 어리버리한 렘브란트가 꽃뱀에게 걸려서 재산을 다 잃을까봐 그런 것 같아요. 돈을 물 쓰듯 했던 렘브란트는 그녀의 유산이 아까워서 맘에 드는 하녀와 동거를 했지만 끝까지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비겁하죠.

게다가 낭비벽은 심한데 그림 주문은 떨어져서 그 많던 재산이 야금야금 없어지다 결국 파산하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시기의 초상화인데요, 불안과 우울한 감정이 기가 막히게 잘 드러납니다. 빗 독촉이 계속되고 집안 물건들에 빨간 딱지들이 하나하나 붙어갈 때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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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고 있는 밧세바>

 

렘브란트가 자신과 동거하던 하녀 ‘헨드리케’를 성서 속의 인물 밧세바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구약 성서 속의 영웅 다윗왕은 유부녀 밧세바에게 반해서 궁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의 편지를 보냅니다. 밧세바가 그 편지를 받은 후 갈 수도 없고 안갈 수도 없는 복잡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왜 렘브란트를 내면 심리 묘사의 대가라 부르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림 속 모델 헨드리케는 전 부인의 유산 때문에 비겁하게 행동하던 렘브란트를 이해하고 주변의 많은 비난 속에서도 그와 함께합니다. 렘브란트가 쫄딱 망한 후에는 그녀가 그림 장사를 해서 그와 그의 아들까지 먹여 살리는 똑순이 역할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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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669>

 

하지만 헌신적이던 헨드리케도 먼저 죽고, 유일한 혈육이던 아들도 렘브란트를 남기고 세상을 뜹니다. 거기다 혹독한 궁핍과 세상의 홀대가 이어지지요. 말년에 그는 돈과 가족을 모두 잃고, 삶을 잘 살지도 못한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모습도 솔직하게 그림으로 남깁니다. (잘나가던 30대 자화상과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우리는 보통 사진을 찍을 때 추하거나 비참한 모습은 남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요새는 ‘뽀샵’이라고 해서 지울 건 지우고 키울 건 키워서 최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남기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과 당당하게 대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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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의 정신적 축을 이루는 불멸의 문학 작품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호메로스는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인간 군상들의 심리 상태를 더 생생하게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렘브란트 역시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세계, 꾸며낼 수 있는 겉모습들에서 초탈해 그 세계 이면의 심연을 파고듭니다. 고집스런 그런 성찰들을 통해 그의 그림은 인물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결국은 그림을 보고 있는 내가 그들의 영혼과 직접 만나고 있는 듯한 신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의 그림을 자주, 그리고 한참 보다보면 이런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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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자화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아예 본인의 운명을 완전히 받아들인 모습입니다. 롤러코스터처럼 현기증 나게 삶의 내리막길을 지날 때도, 그리고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바닥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속상하다며 소주 병나발이나 불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화가로서 본인의 운명을 받아들여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탐구했어요. 그 결과 그의 예술세계는 감히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창조적인 경지에 도달합니다.

 

니체가 목 놓아 부르던 ‘아모르 파티(Amor Fati)’ 기억하시죠? 렘브란트의 일생은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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